평화를 주는 글과 그림

'못다핀 꽃 송이송이 다시 피어나리라'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위한 퍼포먼스

착한짱아 2020. 3. 13. 15:07

몸으로 엮은 상처로서의 역사

 

조은정(미술평론, 미술사학)

Cho, Eunjung(artcritic)

 

 

예전에는 집집마다 전통자수로 수 놓인 액자 하나쯤은 걸려 있었다. 여고 가사 시간에 자수를 배우던 시절의 흔적들은 벽에 걸려 예술인 양 의연히 자리하며 솜씨 좋은 딸을 둔 집안의 자랑거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88서울올림픽도 성공적으로 치르고 세계화한 한국이 세련된 현대생활을 즐기기 시작한 때, 어설픈 솜씨의 자수작품들은 촌스러움의 대명사가 되어 문밖으로 내몰렸다. 그동안의 정리상 차마 쓰레기통에 쳐박지 못한 자수액자들은 곧잘 쓰레기통 가까이 세워진 채로 있다가 거리에 나뒹굴곤 했다. 필자가 본 김순덕 할머니의 <못다 핀 꽃 한 송이>는 바로 이 어설픈 자수를 주어다가 그림의 바탕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1995, 나의 작은 사무실에는 <못다핀 꽃 한송이>를 비롯한 나눔의 집할머니들의 작품이 일시적으로 보관되어 있었다. 책에 넣을 사진을 찍으려고 잠시 빌려왔으나 그 작품이 너무도 귀중하여 외부로 향한 창에 쇠창살이 있던 사무실에 꼮꼭 숨겨 두었던 것이다. 푸른 바탕에 어설픈 자수가 너무도 선명해서 그것을 배경으로 소녀를 그려넣은 김순덕 할머니는 정말 영민하신 분이로구나 생각했고, 크기가 작지만 꼭꼭 눌러 그린 그림들은 너무나 마음 아파서 차마 오래 들여다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은 아물지 않는 상처의 철철 흐르는 피처럼 눈물 고이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이 작품이 사무실에 들어오기 년 전에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거처를 준비한다는 소식에 직원 모두가 선뜻 성금을 모아 이름도 밝히지 않고 보낸 적이 있었기에 인연이란 이렇게 뿌리고 거두는 것임 또한 그때 배웠다.

간간이 필자가 기획한 전시에, 본인의 전시를 위해 소재를 찾는 작가에게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는 데 도움을 주는 작품을 노골적으로 요구하거나 자료를 슬슬 흘리곤 했었다. 미국에 기림비가 설 때 주변인들을 보내 자리를 채우게 하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러다가 이번에 딱 걸렸다. 컴퓨터 안에서 재생되는 배달래의 퍼포먼스를 들여다보고서야 김순덕 할머니의 미소에 이끌려 들어와 버린 것을 알아차렸다. 못다핀 꽃 송이송이 찬란히 다시 피어나리라. 배달래의 퍼포먼스 명제는 김순덕 할머니의 그 못다핀 꽃이, 어느 한 할머니라는 개인이 아니라 다시금 모두가, 마치 심봉사 눈을 뜨자 함께 잔치에 참여한 모든 봉사가 눈을 뜨듯 그렇게 다시 피어나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의 퍼포먼스에 대한 글을 청탁받았을 때, 필자가 생각해오던 몸을 사용한 춤과 제의적인 어느 중간의 작품일 거라고, 물감을 마구 뿌려대는 동작들로 구성된 어떤 무대 같은 것일 거라고 지레 짐작했었다. 그런데 정작 받아든 그의 작품 전모는 국제사회와 함께하는 고통의 역사 극복 문화제라는 거창해보이는 타이틀 아래 마창진시민모임이 주관한다는 문구를 보고는 다른 생각의 틀이 놓여졌다. 서울이라는 대도시 한귀퉁이에서 살아가는 필자는 마창진이라는 단어가 낯설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단어를 들여다보다가 마산 창원 진해라는 지역명이 드러났다. 행정구역명 창원으로 통합된 지역은 정당히 그 이름을 드러내고 있었고, 이것이 지역에 대한 시민의 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통계와 편의주의를 넘어서 전통적인 삶의 장소에 대한 기억의 실재는, 지나간 시간을 역사로 묻어버리고 앞으로만 향하는 일방적인 통행과는 다른 태도와도 맞닿는 것이다.

배달래의 <못다핀 꽃 송이송이 찬란히 다시 피어나리라>는 이 시민들의 의뢰에 의해, 지독히 부족한 예산을 공동의 후원을 통해 이루어낸 작품이다. 작가 하나의 공연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하는 공통의 어떤 것임이 기획에서 실현까지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하지만 작품명이 드러내놓고 이제는 고인이 되신 김순덕 할머니의 작품을 소환함으로 인하여, 할머니의 부드러운 미소와 총명한 눈빛이 현재를 사는 작가가 행하는 퍼포먼스의 아우라를 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존재했던 실체의 힘에 마음 속의 짐작은 범접치 못하는 것이 진실이니 배달래 작가에게 그리 미안할 일도 아니라고 짐짓 생각해본다.

프로젝트는 2018108일일부터 18일이라는 열흘의 기간 동안 작가 중심의 퍼포먼스와 종이비행기 날리기라는 행동주의로 구성된 것이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그리고 공화국의 상징물을 배경으로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

에펠탑이 한눈에 잡히는 트로카데로 광장 바닥에는 검정색 사각형의 바탕 위에 둥근 흰 천을 놓고 퍼포먼스기 진행되었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구조는 둥근 흰 천은 2M의 좁은 원은 위안소와 감금당한 자유를 잃은 여인들의 공간, 세계를 표현한 것이고 둥근 천 밑의 검은 사각 천은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를 통해 멀리서 보면 일장기를 연상시키며 검은색은 먹물이 떨어져도 표가 나지 않는... 그들의 비인간적 행위에 대한 눈속임과 아직도 인정을 하지 않는 일본의 양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동양의 우주관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의 문제에 집중하여 나온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흰 천위에 떨어진 먹의 흔적과 몸짓에서 나오는 거친 흔적들은 그대로 드러나게 하여 위안부 여성들의 한과 아픔을 그대로 표현하게 함.”이 흰 천을 사용한 목적이다.

첼로와 기타리스트의 연주는 퍼포먼스의 시작과 전체 진행을 이끄는 주요한 요소여서 극적 구조를 지닌 서사라는 점을 드러낸다. 흰옷 입은 여성이 공간에 들어선다. 그는 몸을 비틀며 고통의 제스처를 하고 검정옷을 입은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와 꽃을 한 송이씩 던진다. 몸을 웅크리고 펴는 그녀의 신체는 드러나고 흰 원 안에서 움직인다. 꽃에 검정색 먹물을 담가 그녀를 향해 뿌리는 남성, 그는 자신이 바닥에 던진 꽃들을 주어서 다시 먹물통에 담가 뿌릴 것이리라는 예견을 어김없이 수행한다. 꽃을 똑똑 따버린 남성과 그가 던진 먹물의 검정색으로 덮힌 여성, 저항을 하고 다시 유린되는-이는 두 길고 흰 치마에 비해 벌겋게 드러난 두 다리를 통해 강력히 표현된다.- 그녀가 소중히 하는 댕기를 빼앗은 남자는 이를 먹물에 담가 그녀에게 뿌린다, 검정 먹물 투성이가 된 여성. 치마를 들쑤시고, 완전히 댕기를 빼앗아 그것으로 남성은 자신의 더러워진 얼굴을 닦는다. 아예 먹물을 그녀에게 들이붓는 남성. 스스로 얼굴을 더 더럽힌다. 꽃잎이 떨어져 나뭇가지처럼 되어버린 줄기를 들고 와 여기에 먹물을 붓는 남성, 그 가지를 들고 서서히 퇴장하는 여성, 그녀는 지나가면서 백합이었던 꽃의 가지를 질질 끌고 나간다. 이역만리 에펠탑 앞에서.

배달래의 리퍼블리크 앞에서의 퍼포먼스는 기타리스트가 입으로 불어대는 둥근 관악기의 영혼을 울리는 잔향으로 시작되었다. 이국적인 그 초혼의 의식에 이어 흰 옷입은 작가가 등장하고 첼로와 기타의 선율이 소음 속에서 감정선을 지배했다. 이어 나타나는 검정 옷의 남성. 얼굴을 가린 채 먹물을 듬뿍 묻힌 꽃가지를 휘둘러 흰옷 입은 여성의 신체를 더럽힌다. 이어 그는 먹물을 자신의 얼굴에 바르고 손으로 그녀를 공격한다. 그녀가 소중히 여긴 댕기를 빼앗아 먹물통에 담그고 먹물을 뿌려댐으로써. 이어 그는 그녀에게 먹물을 손으로 뿌려댄다. 그리고 예견하는 것처럼 거기에는 유린의 제스쳐들이 나타난다. 여성은 치마 속 다리를 드러내고 검정옷의 남자는 바닥을 기어다닌다. 이 성적인 언어들 속에서 흰백합꽃을 들고 온 남자가 먹물을 꽃에 들이붓고 여자는 절규한다. 여자가 꽃잎들이 떨어져 나뭇가지가 되어버린 백합을 들고 가다가 떨어트리고 사라진 지점에서 남자는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하다가 퇴장한다. 그리고 기타의 단조로운 반복과 첼로의 들릴 듯 말듯한 선율만이 공간을 채운다.

두 퍼포머의 존재적 역학관계는 없다. 이들은 오직 행위로만 규정될 뿐이다.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우리는 그 행위를 지켜보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고 그 관계가 폭력임 또한 알 수 있다. 격정 혹은 유린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신체일까 음악일까. 음악이 없는 행위는 어떤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완전히 동작에 집중했을 때 말이다. 그랬을 때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백합들은 일종의 붓으로 작동하며 먹물통에 담구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 도구는 북구에서는 뜨거운 한증막에서 물을 뿌리는 도구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작가는 백합이 갖는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상징을 선택하여 비판의 틀로 위치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 뜬금없는 유비가 어쩌면 그들 관객 중 누군가의 생각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폭력으로 읽힐 수 있을까. 그래서 몸으로 나타내는 퍼포먼스는 문화의 틀을 갖는다. 상징으로 구성된 문화처럼 제스처 하나하나는 무용적 몸의 언어가 아닌 전통과 조형적 언어의 어디쯤에 위치하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배달래에게 있어 몸은 철저히 작가 자신의 도구였다. 적어도 필자가 본 퍼포먼스에서 그는 물감을 던지고 묻히고 뒤집어쓰는 붓으로 화한 스스로 화면의 일부로 존재하는 칼러인카네이션이라 불러도 좋을 상황을 조성하는 퍼포머이다. 춤과 제의 어디쯤 존재하는 그의 퍼포먼스는 도구로서 작가의 몸이 드러나는 행위이다. 이는 주제 자체가 표상되는 장식의 퍼포먼스와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신체와 도구를 통해 대중의 폭력성을 드러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간파한 것을 드러내는 방식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것이다. 작가 자신을 드러내는 날것의 퍼포먼스 사이에서 <못다핀 꽃 송이송이 찬란히 다시 피어나리라>는 그 제의적인 몸이 드러남으로 인해 소통을 열었다고 평가할 것이다. 이는 그동안 작가의 물감범벅으로 이루어진 회화적 퍼포먼스와는 다른 것이다. 그는 화가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화가도, 인간도 아닌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만신의 접신 행위처럼 우리는 그녀의 몸을 통해 가녀린 넋의 울부짖음을,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가부장적 조직에 의해 유린된 어느 영혼들의 찢어지는 아픔을 보거나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주의, 남성주의라는 제도에 들이밀어진 몸의 언어는 누구나 수행한 학교에서의 과정이었던 수틀에 놓여진 꽃을 보고, 자신의 어느 시절을 상기하고 기록한 김순덕 할머니처럼 그 제도의 모습으로 발언한다.

하나밖에 없는 이 거칠고 소중한 나의 삶을 걸고 내가 하려는 것은 상처를 준 세상과의 화해이자 아픔을 승화하는 몸짓이었다.”라는 말이 작품의 모든 것이었다. 그녀의 삶과 김순덕 할머니로 상징되는 모든 군위안부로 불린 이들의 삶과 억압되고 착취된 모든 삶을 위무하는 광장을 그녀는 만들어냈다. 리퍼블리크, 공화국이란 모름지기 그러한 것이어야 하는 것임을, 실체하는 몸으로 각인시킨다.



사진 이재용